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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스탠소프 워킹홀리데이]

-EPISODE 051-

칙칙!폭폭! 호그와트행 증기기관차 여행




 우리가 *농장일을 하며 머물고 있는 스탠소프(Stanthorpe) 곳곳에는 오래된 기찻길이 놓여져있다. 타운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기찻길. 이 위를 달리는 기차가 있다는 이야기는 귓동냥으로 들었지만 4개월 이상을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운 좋게도 나는 그런 기차에, 스탠소프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기차에! 탑승해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Stanthorpe To Wallangarra 왕복 증기기관차 탑승권



 어느 날 -언제부턴가- 스탠소프 세트메뉴처럼 붙어다니는 친구가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신기한 기차랑 같이 달렸다!!' 하는 말에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카톡으로 배달된 동영상을 보고 '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스탠소프 공원에서 보았던 몇 백 년 전-정확히는 1880년대라고 나와있다.-, 현대적 기술 없이 사람의 힘 그리고 말(Horse)의 도움으로만 놓아졌다는 그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 동영상이었다. 그냥 기차도 아니고 해리포터의 호그와트행 기차가 생각나는 증기기관차가!

 한껏 들뜬 친구는 기차에 탑승했던 할아버지들께 물어물어 팜플렛을 가지고왔다. 11월 26일에 스탠소프에서 왈랑가라(Wallangarra)까지 왕복으로 운행하는 기차가 있으며 가격은 점심 미포함 왕복 50달러 선. 스탠소프 정복을 꿈꾸는 우리는 이 기차에 탑승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만 먹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기차가 출발하는 11월 26일로부터 약 일주일 전, 친구는 예약을 하기 위해 팜플렛에 적혀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돈을 내면 탈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던 기차는 안타깝게도 "매진". 호주에서 증기기관차를 다 타본다며 농장에 데이오프까지 냈는데 매진이라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11월을 끝으로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기차가 없을 것이라 했는데.. 아, 아쉬워라.

 하지만 왠지, 그냥 내가 한 번 더 전화를 해보고 싶었다. 당연히 나도 같은 이야기를 듣겠지 하면서도 직접 차이고(?) 싶었달까. 여자가 전화하면 다를 수도 있다며 친구도 옆에서 부추기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뚜, 신호음 후 전화기 너머로는 들려오던 할머니 목소리. 최대한 정중한 어투로 26일에 증기기관차를 타고 싶다 말했지만 역시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예약은 몇 달 전에 다 찼다, 몇 백 명이 예약을 요청했다, 다음 기회가 있으니 걱정 말라 등.. 이런저런 정보를 주셨지만 결론은 '너네 탈 자리 없어'였기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할머니께서는 Oh, wait!을 외치셨고 나는 놓았던 정신줄이 다시 팽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새 자리가 난건가?! 이후로는 할아버지와 통화를 나눴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 당장 예약은 할 수 없지만 그 날 Warwick(워릭)에서 출발해 스탠소프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당일날 와봐라.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럼 당일날 보자.'


 어차피 데이오프도 냈겠다, 할 일 없는 날이 될테니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가서 또 보기 좋게 차이면 들로 산으로 놀러나가야지 하면서 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1월 26일이 되었고 아침 일찍 도착한 우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기차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너무 수월해서 놀랐을 정도. 심지어 통화를 했던 할아버지는 나를 알아봐 주시기까지 했다. '너가 그 전화했던 여자애구나~' 하며 사람 좋은 웃음까지 날려주셨다. 이로써 다시 한 번 걱정의 9할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다.



오지않는 증기기관차



 열차 출발예정시각은 10시였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 걱정했던 기차표를 구입하고서는 기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10시가 되어도,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지나서도 열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목을 빼고 열차가 오는지 확인하는 사람들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열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보니 워낙 오래된 열차인데다 옛날 방식으로 움직여서 중간중간 자주 멈추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끔은 1시간이 넘게 지체될 때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그 날이 이 날이었는가 보다. 열차는 11시가 넘어서야 뿌-뿌- 하며 나타났다.



스탠소프 홍보대사 할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나 늦어지는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포토타임으로! 스탠소프 홍보대사인듯한 할아버지와 기념사진도 남기고, 우리끼리 셀카도 찍고 또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신 한 할아버지/할머니 커플과도 사진을 찍었다. 교장선생님 느낌이 나던 Alan 할아버지는 며칠 전 한국으로 2주 간 여행을 다녀왔었다며 우리를 반가워하셨다. 한국 사람들 친절해서 좋았다, 어디어디 놀러갔었다 신나게 자랑하시는 모습이 귀여우셨다. 잠시 자리를 비우시더니 할머니를 모셔와 아이패드로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무슨 꽃축제가 너무 예뻐서 좋았다고 하셨는데 안 가본 곳이라 나도 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한국의 이야기를 호주 할머니/할아버지한테서 듣다니, 외국 살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물으시길래 2월까지 스탠소프에 있다가 시드니(Sydney)에서의 짧은 여행 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또 '우리집이 시드니 근처 New Castle(뉴캐슬)에 있는데 그 때 다시 볼 수도 있겠네!' 하셨다.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냉큼 좋아요!를 외치고 2월에 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명함을 받았고, 함께 사진을 찍은 뒤 2월에 또 보자~, 기차여행 잘 하세요~ 하며 헤어졌다. -그 후 할아버지와 이메일로 연락하여 2월 24일에 만나기로 약!속! 이런게 여행지에서의 인연 같은걸까?-



기차온다!



 약 한 시간동안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기대하던 증기기관차가 등장했다. 칙칙!폭폭! 뿌-----우!



왈랑가라(Wallangarra)행 증기기관차



 내가 증기기관차를 타보게 될 줄이야. 기억에 잘 없는 어린 시절 기차박물관에서 얼핏 본 듯하고, 언젠가 사회 교과서에서 산업혁명과 관련해 배운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증기기관차를! 지구가 아파할 것만 같은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를 보니 설레기 시작했다.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행 열차가 생각나는 기차의 외관이 나의 설레임에 기름을 붓는듯 했다. 왠지 내가 서있는 스탠소프의 승강장이 9와 3/4 승강장인 느낌!





 끼익 소리를 내며 정차한 기차 앞 칸에는 단체복을 입은 꼬마들이 타고있었다. 방송국에서 나와 기차에 타고 있는 꼬마들에게 기차여행 재밌느냐며 인터뷰하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도 외국인 대표로 인터뷰 좀 해볼까하고 카메라를 든 아저씨 근처를 알짱알짱거렸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던 매정한 아저씨. 






 기차를 채우고 있던 꼬마들이 우르르르 내리고 비워진 자리를 우리가 차지했다. 24번부터 26번까지의 세 자리. 좌석번호가 정해져있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곳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면 그만이었다.

 웃기게도 자리를 잡은 곳 맞은 편에 우리 *버섯농장 사장님 가족이.. 있었다.  사장님 내외와 10대 세 자매는 가족 나들이를 나온 듯 보였다. 날 보고 반가움에 Darney!!를 외치시던 사장님의 모습에 덩달아 반갑긴 했으나 바로 맞은 편에 앉게될 줄이야.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뭐, 나쁘지는 않았다.



달려라 증기기관차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고 열차는 또다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했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처럼 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와 좀 창피했다. -사장님이 보고있다.- 


 그리고.. 기차에 타기 전부터 예상했지만 타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이 증기기관차는 예비 마법사 학생들을 태운 호그와트행 기차가 아니라 '효도관광열차'라는 사실이. 기차에 탄 대부분의 승객들이 다 할아버지/할머니였다. 아마 이 날 이 기차에 탄 20대의 수는 우리 셋을 포함해 손에 꼽힐 정도였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할머니 손 붙잡고 따라온 손자손녀들과 버섯농장 사장님네 10대 세 자매를 다 합쳐도 10명이 겨우 넘을 듯- 심지어 동양인은 정말 딱 우리 뿐. 서양 할아버지/할머니들 틈 사이에 젊은 동양인 셋이라..



스탠소프의 흔한 흑소



 기차는 스탠소프 구석구석을 지났다. 스탠소프에서는 흔한 소와 말과 양이 풀 뜯는 모습도 보고, 산 속을 지날 땐 도망가는 왈라비도 봤다. 왈라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우와!를 외치는 바람에 사장님 가족에게 큰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엄빠미소는 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내뿜는 검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창문 밖으로 쭉 내뺀 내 얼굴을 때렸다. 뭐 좋다고 그렇게 들이마셨는지 집에 와서 세수하다가 검정 콧물에 보고 깜짝 놀랐다. 



[출처] 위키피디아 - Wallangarra Railway Station



 콧속에 검정 먼지를 쌓으며 1시간 20여분을 달려 목적지인 Wallangarra 역에 도착했다. 돈 아까움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기차는 굉장히 지루했다. 뛰쳐가는 왈라비를 본 것까지는 재밌었으나 그 이후로는 계속 초록초록한 같은 풍경이었던지라.. 딱 잠들기 직전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동네투어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 동네를..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당장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아야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돈이 없어 점심이 포함되어있지 않은 저렴한 티켓을 구입한 것이 후회됐다. 다른 사람들은 내리자마자 역 안의 레스토랑으로 뷔페를 즐기러가던데.. 이왕 돈 쓰는 거 조금 더 쓸걸 싶었다.





 나오라는 음식점은 안 나오고 이런 것만. 





 조금 더 걸어나가 겨우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 들어갔는데 가격 때문에 다시 뛰어나왔다. 아.. 그냥 점심이 포함된 옵션을 구입하는게 나았을 것 같다.



Fish n' Chips왈랑가라(Wallangarra)역 안의 레스토랑 피쉬 앤 칩스



 결국에는 다시 역 안의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뷔페를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당당하게 단일메뉴를 주문했다. 얼핏 본 뷔페 음식이 그렇게 알차보이지는 않아서 조금 안심이 됐다. 우리가 주문한 -비싼- 피쉬 앤 칩스(Fish n' Chips)와 버섯 파스타는 예상외로 맛있었다. 





 두둑히 배를 채운 후에는 다시 증기기관차 구경. 승객들이 점심을 즐기는동안 관계자분들은 기차 앞에 붙어있던 기차 머리를 뒤에다 옮겨붙이는 작업을 하고있었다. 신기했던 구경거리. 





 이 효도관광열차 안에도 나름 등급이 있어서 기차 머리와 가까운 부분은 우등석이었다. 잠깐 창문 너머로 구경했는데 의자 중간에 테이블 하나 더해진게 전부였다. 굳이 하나 더 꼽자면 의자색이 더 강렬하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기차가 멈춰있는동안 연료를 태우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거의 뭐 초등학교 과학탐방 수준의 경험이었다.





 아마도 다시 타보기는 힘들 증기기관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상하게 영화 부산행이 생각나는 사진.





 호그와트 열차 정면에서도 찰칵! 들어올 때는 WALLANGARRA라고 쓰여있던 기차 머리의 팻말이 어느새 WARWICK으로 바뀌어있다.



사장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왈랑가라에서의 점심식사와 휴식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스탠소프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기억이 별로 없다. 모두가 잠든 사장님 가족 사진을 찍은 이후로 나도 곯아떨어져 버렸다. 요람효과라고 불리던가. 지하철이나 기차 같은 곳에서 몸이 흔들거리면 잠이 더 잘 오는 현상이.. 올 때는 그냥 '지루하다', '노곤하다' 정도였는데 밥 먹고 나서 요람효과 만빵인 기차 안에서, 아까랑 똑같은 풍경을 보고있자니 잠이 막 쏟아졌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의 기억은 그저 중간중간 눈 떠서 서로의 잠자는 모습을 찍으며 키득거렸던 것 뿐이다. 탈 때는 설렜는데 잠이 쏟아지던 이 땐,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스탠소프역



 졸다보니 어느새 다시 스탠소프. 기지개를 키며 기차에서 내리던 사람들. 우리만 요람효과를 느낀게 아니었나보다.



기차는 휴식중



 기차는 스탠소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는 스탠소프가 종착역이었지만 기차는 워릭까지. 워릭에서 탔으면 큰일날 뻔 했다.. 차로도 40분이 걸리는데 이 느린 요람 기차로는 얼마나 걸릴지.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칙칙폭폭



 스탠소프를 정복하겠다 선언한 우리에게 기차여행은 분명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기차에 타본 호주 워홀러가 과연 몇이나 될지. 워홀러로 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열차에서 요람효과를 느끼며 잠드는 것은 성신여대입구역에서 탈 수 있는 4호선 지하철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왠지 호그와트행이라는 수식어도 취소해야할 것 같지만.. 외모가 비슷하니 남겨두는걸로.


 그래도 한 번 쯤은 해볼만한 경험이니 여유가 있는 워홀러에게-티켓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음-, 또는 호주 여행자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날이면 날마다 있는 기회가 아니니 흔치 않은 경험 했다고 자랑하기에 딱 좋다! 증기기관차 탑승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Southern Downs Steam Railway 공식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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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ney

그만 좀 싸돌아다녀 이것아
@darney.tr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