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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워킹홀리데이, 그 마지막]

-EPISODE END-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아름다웠던 나의 358일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 두근거리던 그 날의 떨림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다.



 2016년 3월 5일 오전 4시. 꽃을 시샘하는듯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나의 자취방을 나섰다. 1년치 짐을 무리하게 꾸겨넣은 20kg의 캐리어와 30kg의 이민가방을 질질 끌고나와 어둠 속에서 인증샷을 한 방 찍은 후 그 날 처음 운행하는 공항버스에 탑승했다. 앞으로 동여맨 작은 가방에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잘 들어있는지, 미리 환전한 약 200만 원 어치의 호주 달러가 지갑 속에 안전하게 들어있는지 수 번을 확인한 후에야 달리는 공항버스의 등받이에 기댈 수 있었다. 밤새 짐을 싸느라, 걱정하느라, 설레어하느라, 또 첫 차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나느라 한 숨도 자지 못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호주는 가을이라는데 지금 입고있는 패딩이 너무 덥지는 않을까, 예약한 숙소까지 잘 찾아갈 수는 있을까, 덩치 큰 백인들에게 돈을 뜯기지는 않을까, 영어로 어떻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게 좋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들은 밀려오는 잠을 몰아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1년 전, 호주로 향하는 그 첫 단계에서 나는,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온 몸으로 설레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날의 떨림은 1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떨림이었다. 지진으로 치면 거뜬히 규모 10을 넘을, 그런 진동. 그 때문일까, 그곳에서의 1년은 나의 25년 인생 중 가장 파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행기를 타러 가던 공항버스에서부터 일자리를 찾아 다니던 브리즈번에서의 평범한 나날들, 주말마다 여기저기 차를 타고 떠나던 날들과 스탠소프에서 버섯을 따던 날, 그리고 마지막날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그 순간까지 말이다.



첫 암벽등반. 비록 실패했지만 값진 도전이었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떠난 호주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도전이었다. 영어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 낯선 지폐와 동전의 가치를 익히는 것, 마트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것, 당장 먹고 살 돈을 버는 것.. 익숙한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에서 매일을 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쓸데없는 것에 돈을 지불하기도 했고, 원하던 것과 다른 음식을 받아들고 벙찌기도 했었다. 어쩌다 한 번은 1달러와 2달러짜리 동전을 혼동해 더 많은 거스름돈을 받아내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보같았던 내 행동에 코웃음이 나지만 그런 어설펐던 행동들이 모여 시간이 지나 제법 '호주에서 사는 사람'같은 나를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 날의 벙쪄있던 나를 향해 칭찬의 박수를 보내련다.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활짝 피어있던 해바라기



 지난 358일 간의 호주 생활은 분명 '아름답다'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날들이 아름답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스스로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기도 했었고, 어느 날은 서러움에 눈물샘이 폭발한 날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한국행 티켓이 아닌 저승행 티켓을 끊을 뻔 하기도 했었고, 어느 날은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술 생각이 절로 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여행 에세이 책에서 말하길, 여행 후에는 '일단 기억 상자 속으로 들어가면 가슴 아린 추억이 된'단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 허우적거리던 정신적 고통도, 눈물이 폭발하던 그 날의 서러움도, 죽음의 문턱에서 덜덜 떨던 두려움과 긴장감도, 술 생각을 나게 하던 답답함도 지금은 모두 내 기억 상자 속 가슴 아린 추억이 된 듯하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사지 멀쩡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기억 상자를 열어보며 그 소중했던 시간들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승행 열차를 탈 뻔 했던 그 날, 조금만 잘못 되었더라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은 없었을테니.



내 인생 최고의 노을



 물론 우연하게 발길이 닿은 어느 바다에서 바라본 핑크빛 일몰을 보았던 순간, 꾸준하게 버킷리스트에 적혀있던 스카이다이빙을 진짜로 해내던 순간, 처음으로 낚싯대로 커다란 물고기를 건져올리던 순간, 카지노에서 미니 잭팟이 터져 한 순간에 200달러를 딴 순간, 달리는 차 안에서 스쳐지나가는 바깥 풍경들을 마음 속에 담으면 옛날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던 순간 등 머릿 속에 아름답게 새겨진 추억들이 훨씬 많기는 하다.



스탠소프의 흔한 밤 하늘



 358일. 1년 365일에서 정확하게 일주일이 모자란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온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가운 호주의 여름 태양을 맞던 여유로운 날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의 열흘은 정신없이 바빴다. 다시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1년동안 친구가 살았던 내 자취방을 다시 '내 방'으로 꾸미고, 그리웠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 안부를 전하고..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공인인증서를 비롯한 각종 서류들을 구비하느라 말이다.

 며칠 전 가족들을 만나고 서울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지하철 특유의 푸쿠푸쿠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저마다의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앞 좌석 일곱 승객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빨빨이를 타고 달리던 스탠소프의 길 풍경이 눈 앞에 그려졌다. 옆 자리의 운전대를 잡은 남자친구가 '이제 조금 있으면 이런 거 못 봐~ 잘 봐둬!'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쌩쌩 달리는 차의 바람에 못 이겨 흔들리던 얇은 풀들과 노랗게, 푸르게 예쁜 색을 뽐내던 어색한 사각형 모양의 밭, 차가 지나가거나 말거나 느린 속도로 풀을 뜯는 소들.. 우습게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풍경을 떠올리며 감정이 벅차올랐다. 서울 생활 고작 열흘 만에 나는 지쳐버린걸까, 나는 호주가 그리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태운 지하철 4호선은 계속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 타고 달리던 그 길의 풍경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버섯 농장에서 일하던 나의 일상은, 주말이면 빨간 차를 타고 바다로, 산으로 놀러나가던 나의 여유는 마치 꿈 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깨기 싫어서 억지로라도 다시 잠에 들고 싶은 그런 여운이 남는, 아주 긴 꿈을 꾼 듯하다. 벌써부터 호주를 떠올리며 눈물을 그렁거릴 정도로 나는 그곳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아마 여독이 덜 풀린 탓일게다.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떻게 해서든 호주로 떠나야지 별 수 있나 뭐.



골드코스트의 고운 모래를 발가락 사이사이로 느껴본 날



 1년만에 만난 친구들은 '호주가 어땠냐'고 물었다. 358일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려면 하루도 모자라기에 간단하게 '좋았어~' 또는 '재밌었어~'라고 말하면, 대답은 하나같다. '아.. 부럽다~'. 그럴 때마다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비행기 티켓을 끊으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핑계가 먼저 튀어나온다. 영어를 못한다거나 곧 시험을 봐야한다거나 자신이 없다거나. '핑계'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사실 내 친구들에게는 '현실'이라는 커다란 장벽이라는 걸 알고있다. 그렇기에 부럽다면서 떠나지 못하거나 떠나지 않는 내 친구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내심 그들이 나의 '떠나!!'라는 말 한 마디에, 카톡 한 줄에 세뇌 당해 진짜 떠났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실 그렇게 자랑할만큼 '성공적인 워홀'을 보내지는 못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버킷리스트랍시고 줄줄이 적어놓았던 항목들 중 고작 2~3개 정도만 체크했고, -조금 더 정확히는 버킷리스트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이 워홀에 기대하는만큼 많은 돈을 벌지도 못했으며, -벌어온 돈은 이번 학기 등록금으로 다 써버려서 사실 남은게 하나도 없다. 슬프게도 사실이다.- 영어가 그렇게 많이 늘지도 않았고, 울룰루도 못 가보고 로드트립도 못해봤으니 제대로된 여행을 했다고 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무작정 떠나라고 외치는건 호주에서의 1년 그 자체가 배움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음식을 주문할 때 너무 쉬운 영어 문장 하나 뱉는게 공부였고, 익숙하지 않은 기차를 타고 구글 지도를 보며 무작정 걷는게 여행이었다. 그리고 호주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모든 사람들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모든 노동에는 가치가 있다는 것, 여유란 낭비가 아닌 휴식이며 또다른 배움의 장이라는 것 등. 이 외에도 배우고 느낀게 정말 많지만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어 아쉽지만 혼자만 알아야겠다. 아무튼 이런 배움들이 소중하다 생각되기에 나는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워홀을 떠나기를 권장하고 싶다.



스탠소프 뒷산 Giraween. 3시간 등산 후 만난 멋진 풍경



 호주를 '아름다웠다'라고 표현한건 호주가 말그대로 정말 아름다운 곳이기에 그렇다. 브리즈번에 있을 때에도 골드코스트와 같은 아름다운 여행지들을 돌아다니며 그 모습에 반하곤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호주'를 알기 시작한건 스탠소프로 이사를 한 후부터인 것 같다. 드넓은 초원과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 그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동물들, 바위들, 꽃들.. 무슨 3D RPG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곡괭이 아이템을 사서 옆을 두드리면 철광석이 뿅 하고 튀어나올 듯한 그런 모습. 산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캥거루들을 볼 때면 더더욱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버섯 농장 식구들과의 코스튬 파티


힘들었지만 유쾌했던 친구들과의 등산



 하지만 아름다운 호주에서의 생활이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건 함께한 사람들 덕분이지 않을까. 내 호주 생활을 더 아름답게, 더 윤택하게, 더 즐겁게 만들어준 여러 사람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 감사 인사를 보내고 싶다. 설레는 첫 출발부터 한국에 들어온 날까지 온갖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한 내 남자친구에게 우선 가장 큰 감사와 사랑을♥ / 예상치 않은 사고로 내 워홀 생활의 2막을 열어준 대구사람 은재야, 미워할 뻔 했지만 생각해보니 고마운 일이 더 많은 것 같구나. 신세 많이 졌으니 앞으로도 신세 좀 질게, 돈 많이 벌어와 ^^ 그 외 25 College 식구들: 채은언니, 준수오빠, 장원이, 제윤이, 가예, 성원이, 인재, 유카리, 토모카. 사랑이 꽃피는 25 college를 못 보고 와서 아쉽지만 여러분들과 함께한 지난 몇 개월은 참 즐거웠어요, 컹스! 장원이랑 제윤이한테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참, 불쌍한 끝방 할배 좀 챙겨주세요.. / 스탠소프에서 좋은 친구가 되어준 Yoko와 Koey! 너희와 함께라면 언제나 웃겼어.. 다시 같이 낚시 다닐 날이 오기를! / 버섯 농장에서 만난 유쾌한 대만 친구들: Angel, Dennis, Fang, Elaine, Yipai, Rebecca. 우리만 동양인인줄 알았는데 먼저 살갑게 말걸어줘서 고마운 Angel. 결혼할 때 꼭 청첩장 좀 보내줬으면♥ / 버섯 농장의 호주 친구들: Sam, Lizzie, Erin, Lisa, Amy, Rosie, Janet, Maria, Kaylie, Billie, Kerry, Gerda, Danika... 그리고 분홍 머리 핀이 귀엽던 트레이너 Sharon과 태어나서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예쁜 눈을 가진 Lisa, 토끼 같은 슈퍼바이저 Karen, 너무 좋은 사장님 Alida까지. 영어 못 알아들어서 답답했을텐데 왕따 안 시키고 항상 챙겨줘서 고마워요! Thanks a lot guys!! / 3주 간 잠시 머물렀던 잉햄에서 워홀 생활의 멘토가 되어준 인생 선배님들: 대현오빠, 일영오빠, 탐식오빠, 기선오빠, 상은오빠, 소라언니, 끝나고 함께 퇴근하던 민혁오빠, 보람이언니. 무기력하게 지내던 날 중에 언니 오빠들 보며 정말 많이 배웠어요~ 한국에서 또 뵐 수 있길! 참, 호주에서 너무 예쁜 결혼식 올린 일영오빠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D / 워홀 초반, 도서관에서 만나 이곳저곳 데리고 다녀준 일본 친구 나나짱! 이번 여름 도쿄에서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중~ / 아마도 다시는 살아보지 못할 고급 아파트에서 너무 좋은 하우스메이트가 되어준 콜롬비아 커플 Camila와 Julian. 둘 다 너무 선남선녀여서 얼른 결혼했으면 좋겠다. 아마도 몇 년 후 있을 결혼식 구경 겸 콜롬비아 여행도 기대 중 *_* / 웹 제작 일로 만나서 호주 생활 전반에 큰 도움이 되어주신 상영님! 비록 사업은 잘 안 됐지만 해주신 모든 좋은 말씀들이 다 주옥 같았어요. 앞으로 모든 면에서 대박 나시길 바라요 :) 

 그 밖에도 스쳐지나간 모든 인연에게, Thank YOU ALL!




 358일간의 길었던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났다. 아주 제대로 꿀잠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 기지개를 켜고 서울의 새 아침을 맞이하러 나가봐야할 것 같다. 

 아! 잘~ 잤다, 정말 좋은 꿈을 꾼 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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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Darney

그만 좀 싸돌아다녀 이것아
@darney.tr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