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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 워킹홀리데이]

-EPISODE 021-

워홀 슬럼프, 절망의 구렁텅이




 며칠 전 집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을 보았다. 고아인 빨간머리 앤이 초록지붕 집으로 입양되는 이야기로 영화 전체가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으나 앤의 대사 한 마디가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거든요.." 많은 명대사 중 유독 이 말에 꽂힌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지금 바로 그 절망의 구렁텅이 안에서, 깊은 절망의 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리라.



thumb[영화]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



 영화에서 앤은 말한다. "절망의 바닥에 있는데, 먹을게 넘어가겠어요?"라고. 주근깨 빼빼 마른 앤은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의 바닥에서 밥도 못 넘기고 있지만 통실통실한 나는 절망의 바닥에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계속 먹고만 있다. 


 일자리를 찾아다닌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반이나 지났다. 워킹홀리데이 일자리를 구하는게 어렵다고 말도 많이 들었고, 어느 정도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하루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이력서를 뿌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구직 사이트를 새로고침하며 이메일을 몇 통 씩 보내도 연락이 오는 건 거의 없다. 




보낸메일함


 

 그럼에도, 한 달동안 매일 이력서만 보내는 하루하루를 보냈음에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주에는 되겠지, 다음주에는 되겠지.. 하지만 굳건한 내 정신력도 거듭되는 실패에 무너져갔다.

 이력서를 제출한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건 괜찮았다. 하루에 수 십 통 씩 이력서를 뿌리는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니까. '지금 사람을 구하고 있지 않구나', '내 이력서가 별로였구나' 혼자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나를 이렇게 지치게 만든건 친절하게 나를 대해준 사장님들과의 인터뷰 후였다. 그 중에서도 이틀 전 카페에서 본 인터뷰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 나를 그 구렁텅이의 바닥에 내팽겨쳐 버리는 것 같았다.



검트리(Gumtree) 캡쳐



 며칠 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구직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넣고 있었고, 호주 워홀러들의 대표적인 구직사이트인 *검트리(gumtree)에서 괜찮은 구인글을 발견했다. 브리즈번 시티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서 바리스타/샌드위치 핸드(Barista/Sandwich Hand)를 구하고 있다는 글이어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그 날 저녁 바로 전화가 왔다. 내 이력서가 마음에 든다며, 내일 아침 카페에서 인터뷰를 보자고. 호주 사람이 운영하는, 흔히 말하는 오지잡이어서 좋았고 왠지 괜히 느낌도 좋았다. 호주 워홀 백수 생활 한 달 반 째, 이제 진짜 일을 구할 때가 되었으니 정말정말 최선을 다해 인터뷰를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 날 밤엔 유투브로 커피 만드는 영상, 샌드위치 만드는 영상을 찾아보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몇 시간 전부터 일어나 깔끔한 옷도 꺼내입고 화장도 제대로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보러갔다. 카페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가게였고, 노부부 두 분이서 운영하고 있었다. 어제 통화를 나눴던 Mark가 이것저것 가게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니, 인터뷰라기 보다는 일을 나온 첫날 같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다른 스태프들을 소개해주고, 가게에서 판매하는 샌드위치 종류와 커피 등도 알려주고.. 또 트라이얼로 만들어 본 라떼가 망해서 '아, 또 망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의 주 업무는 샌드위치 만들기이니 걱정말라며 다 처음부터 가르쳐 줄거라고 했다. Mark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번에는 정말 된 줄 알았다. 정말로..

 그렇게 10여분동안 이어진 인터뷰가 끝이 나고, Mark는 또 다른 후보자가 있으니 인터뷰를 보고 내일 연락을 주겠다며 인사를 했다. 살짝 불안감이 엄습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될거라고 믿었다. 내일 올 전화가 기다려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일 온다던 전화는 뜬금없이 그 날 저녁에 울렸고, Mark는 오늘 시간내줘서 고맙다는 말만 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만 해도 '전화왔다!!'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내가 된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정말인줄 알았는데... 내가 영어를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물어봤다. So, I am NOT hired. right?..


 허무하고, 절망적이고, 내 자신이 밉고.. 호주에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거면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지나 말지, 착해보이던 또 다른 직원들 소개해주지 말지, 못 만든 라떼보고 괜찮다고 말하지 말지.. 아, 그러면 이제 내일은 또 뭘 해야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들은 일단 연락이 와서 인터뷰를 보러 가면 반은 성공한 거라고 하던데 왜 그 나머지 반을 성공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운건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수 십 통 씩 이력서를 돌리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인터뷰를 봤었는데.. 왜 내가 되지 않은건지 다음에 고칠 수 있게 이유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하는게 그저 답답할 따름. 매번 반복되는 이 과정이 이젠 지겹다.





 굳이 호주까지 와서 절망의 구렁텅이의 바닥에 붙어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할 경험이니까. 또 돈을 벌고 있는 남자친구도 함께 있고, 이 전에 일을 하며 모아둔 돈도 있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부업도 하고 있고.. 무엇보다 내 몸 건강히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더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부디 멀지 않은 미래이길 바랄 뿐..

 다음 주에는 절망의 구렁텅이 밖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틀만에 초록 지붕 집에서 살 수 있게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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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Darney

그만 좀 싸돌아다녀 이것아
@darney.travel